이탈리아 피사(Pisa) 근교인 몬테마뇨에서 태어난 성 에우게니우스의 본명은
피에트로 파가넬리인데, 그가 피사 대성당의 성직자가 된 후 성 베르나르두스를 만남으로써 1135년에 클레르보에서 시토회원이 되었다.
그 후 로마의 성 아나스타시우스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다가 전혀 예상하지 않던 교황으로 선출되자 이름을 에우게니우스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선출을 반대하던 브레시아의 아놀드의 농간과 로마 원로원의 통치를 인정하기를 거부했을 때 그는 로마를 탈출해야만 하였다.
그는 1145년 2월 18일 파르마 수도원에서 비밀리에 축성식을 가졌다.
그 후 몇 가지 조약을 체결한 뒤에 로마로 돌아가 정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초청으로 그는 1147년에 그곳을 방문하였고
제2차 십자군 운동을 선포하였다.
비록 이 십자군은 성 베르나르두스의 노력이 지대하였지만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두스 2세군의 패퇴로 말미암아 실패로 끝났다.
에우게니우스는 1147년에 파리와 트리어에서 시노드를 개최하고,
다음 해에는 랭스에서 시노드를 열어 아놀드를 단죄하였다.
세상이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았을 때 그는 로마로 귀향하였으나,
1150년에 재차 강제로 로마를 떠나야 했다. 이번에는 티볼리에 거주하였고,
1153년 프레데릭 황제와 콘스탄츠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교회의 권리를 보증하는데 유익한 협약이었으나,
그는 그해 7월 8일에 그곳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그는 소란스런 재임 기간을 통하여 몇 가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동방 교회와 로마와의 일치를 시도하였고, 성직자의 규율을
재정비하였으며, 명예스럽지 못한 성직자들을 제거하였고,
마니교의 재건을 봉쇄하였다.
그는 실로 용기가 많았고 단순하였으며 항상 성 베르나르두스의 영적 권고를
따라 생활하여 덕이 출중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72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