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6월27일(토-福되신童貞마리아) 알렉산드리아의 聖치릴로 주교學者님..등

H-Simon 2009. 6. 26. 08:31

 

6월27일 (토-福되신童貞마리아)
   알렉산드리아의 聖치릴로 주교學者님..등

 

 
                     

                                                         <6 월   예 수 聖 心 聖 月

                      

             하느님,  성인 성녀님들의 기도와 공로에 힘입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려는 저희를,

             아버지의 사랑과 평화로 강복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리옵나아다....아멘

                                             ****     ****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라디슬라오** Ladislaus 6월 27일 헝가리(Hungary) 1040-1095년
2 복자 벤베누토 ** Benvenuto 6월 27일 수사 구비오(Gubbio) +1232년
3 삼손 Samson 6월 27일 신부   +530년
4 아넥토 Anectus 6월 27일 순교자   +303년
5 아리알도 ** Arialdus 6월 27일 부제,순교자 밀라노(Milano) +1066년
6 요한 John 6월 27일 은수자 시농(Chinon) +6세기
7 제오르지오 므타스민델리 George Mtasmindeli 6월 27일 수도원장   1014-1066년
8 조일로 Zoilus 6월 27일 순교자   +304년?
9 치릴로 ** Cyril 6월 27일 총대주교,교회학자,교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380-444년
10 크레센스 Crescens 6월 27일 바오로의 제자,주교,순교자   +2세기
11 페르디난도 Ferdinand 6월 27일 주교 아라곤(Aragon) +13세기
총 11 성인

 

 

                     너무나 인간적이셨던

                     성인 성녀님.....

                     아름답게, 아름답게 사셨던님, 

                     사랑 해요,  님들이시여!

 

    ▶라디슬라오(6.27)
 
성인명 라디슬라오(Ladislaus)
축일 6월 2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활동지역 헝가리(Hungary)
활동연도 1040-1095년
같은이름 라디슬라우스

   베른하르트슈트리겔_동정마리아에게블라디슬라프2세와그의아들들을소개하는성라디슬라오.


   헝가리의 국왕 벨라(Bela)의 아들로 태어난 성 라디슬라우스(또는 라디슬라오)는 1077년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한차례 친척들의 퇴위 요구를 받은 적이 있으나 이를 무사히 진정시켰다. 그는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7세를 적극 지원하면서, 헝가리의 성왕인 스테파누스를 거울삼아 그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바이에른의 공작 웰프의 딸인 아델라이드와 결혼하였고, 쿠만족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물리쳤으며, 자신의 나라에 그리스도교를 적극 장려하였다. 뿐만 아니라 많은 성당들을 세웠고, 유대인들과 마호메트인들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관대함을 보였다. 1092년의 자볼릭 교회 회의에서 그는 종교적, 사회적 사건들에 대한 일련의 법을 선포하였고, 제1차 십자군의 지도자로 선정되었으나 출전하기에 앞서 보헤미아의 니트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헝가리의 국가 영웅 중의 한사람이며 헝가리의 영토를 최대한으로 확장했던 위대한 왕임과 동시에 통치자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정의를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덕스러운 삶을 살았다. 그는 사후 바로 공경을 받기 시작하여 1192년 교황 코일레스티누스 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의 유해는 자신이 세운 나기바라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벤베누토(6.27)
 
성인명 벤베누토(Benvenuto)
축일 6월 27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수사
활동지역 구비오(Gubbio)
활동연도 +1232년
같은이름 벤베누또, 벤베누뚜스, 벤베누투스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의 구비오 태생인 벤베누투스는 맹세한 군인이었으나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프란치스코회의 영향이 미치자 그 역시 회원이
되었다. 그가 수도회에 입회한 날부터 성 프란치스코를 따라 자신의 모든
행동을 할 만큼 그는 단순하였다. 자신의 요청에 따라 나환자들을 돌보게
되자, 그는 그들을 우리 주님 당신으로 생각하고 상처를 싸매고 몸을
씻겨주었다. 항상 예모 있게 처신한 그는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다.

   그의 사랑이 이토록 지극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자신이 여러 병으로
늘 고생하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는 온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였고, 미사 때에는 자주 아름다운 아기 예수의 환시를
보았으며, 자신도 모르게 끌어안으려고 팔을 내밀었다고 전해온다.
이처럼 단순한 그의 생활은 즉시 온 세상에 두루 퍼졌으며, 1232년에
풀리아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사망이 있은 지 4년이 채 못 되어서 베네치아와
아말피의 주교들로부터 그의 공경이 허락되었으며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다.
 
 
 
 
    ▶아리알도(6.27)
 
성인명 아리알도(Arialdus)
축일 6월 2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부제, 순교자
활동지역 밀라노(Milano)
활동연도 +1066년
같은이름 아리알두스

 

   성 아리알두스(또는 아리알도) 부제는 당대 주로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행해진 성직매매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요 개혁운동의 대표자로 알려졌다.
그로 인해 그는 파문되는 등 갖은 박해를 받다가 성직매매를 행한 밀라노의
대주교에 의해 살해되어 호수에 던져졌다. 그의 시신은 10개월 후 발견되었는데, 부패하지도 않았고 감미로운 향기가 났다.
그 후 그의 유해는 밀라노 주교좌 성당에 안치되었고, 1067년 교황 알렉산데르
2세에 의해 순교자로 선포되었다. 그에 대한 공경은 1904년에 승인되었다.
 
 
 
 
 
 ▶치릴로(6.27)
 
성인명 치릴로(Cyril)
축일 6월 2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총대주교, 교회학자, 교부
활동지역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활동연도 380-444년
같은이름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우)와 성 아타나시오-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태생인 성 키릴루스(또는 치릴로)는 그 도시 총대주교인 테오필루스의 조카였다. 성 키릴루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고전과 신학 교육을
받았고, 그의 아저씨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403년 총대주교를 수행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갔으며, 그곳에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단죄한 퀘르키아 주교회의에 참석하였으며,
417년까지는 테오필루스의 노선에 따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반대하였다. 412년 10월 15일 테오필루스가 사망하자 성 키릴루스는 사흘 후에 그의
아저씨를 계승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성 키릴루스의 지지자와 그의 라이벌인 티모테우스의 지지자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 그는 큰 상처를 입고 출발하였다. 그런데 성 키릴루스는 자신이 축출하였던 노바티아누스 이단을 상대로 일련의 공격을 다시금 재개하였다. 그 결과 그가 그 도시에서 몰아냈던 유대인들과 총독 오레스테스는 그의 이같은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430년 성 키릴루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와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이지 인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천주의 모친일 수 없다고 가르쳤으며, 따라서 마리아에게 '천주의 모친'(Theotokos)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성 키릴루스는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를 설득하여 430년 8월에 로마에서 주교회의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같은 해 11월에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주교회의를 열어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단죄하여 교회 일치를 도모하였다.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 교황은 성 키릴루스로 하여금 네스토리우스를 축출하도록 지시하였고, 성 키릴루스는 431년 제3차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교황의 특사 자격으로 의장직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때 200명 이상의 주교들이 대거 참여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 이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가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 요한과 42명의 추종자들이 대거 몰려오기 전에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추종자 세력을 단죄하여 분쇄하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일파는 그들 나름대로 회의를 소집하여 성 키릴루스를
축출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성 키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를 체포하였으나, 교황대사가 와서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공의회의 결정이 올바르다고 전하자 성 키릴루스는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2년 후 안티오키아 주교들을 대표하는 요한 총대주교와 성 키릴루스는
위의 단죄를 인정하는 동의안을 결의하는데 도달하였고,
네스토리우스는 강제로 유배되었다.

   그 후 성 키릴루스는 삼위일체와 강생에 관한 교리 확립과 신학 논문
저술에 여생을 바쳤고, 그리스도교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펠라기우스주의와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배격하는 일을 하여 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가장 유명한 신학자이다.
그의 저서는 정확한 사고와 명확한 전개 및 그 합당한 근거 제시로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성서에 관한 그의 주석서 가운데에는 요한, 루카 그리고 모세오경이 있으며,
수많은 교의신학 논문을 비롯하여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반박문,
편지 그리고 강론들이 전해온다. 그리스 교부의 한 명인 성 키릴루스는
1882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언되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은 6월 9일에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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