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태생인 성 키릴루스(또는 치릴로)는 그 도시 총대주교인 테오필루스의 조카였다. 성 키릴루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고전과 신학 교육을
받았고, 그의 아저씨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403년 총대주교를 수행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갔으며, 그곳에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단죄한 퀘르키아 주교회의에 참석하였으며,
417년까지는 테오필루스의 노선에 따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반대하였다. 412년 10월 15일 테오필루스가 사망하자 성 키릴루스는 사흘 후에 그의
아저씨를 계승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성 키릴루스의 지지자와 그의 라이벌인 티모테우스의 지지자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 그는 큰 상처를 입고 출발하였다. 그런데 성 키릴루스는 자신이 축출하였던 노바티아누스 이단을 상대로 일련의 공격을 다시금 재개하였다. 그 결과 그가 그 도시에서 몰아냈던 유대인들과 총독 오레스테스는 그의 이같은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430년 성 키릴루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와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이지 인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천주의 모친일 수 없다고 가르쳤으며, 따라서 마리아에게 '천주의 모친'(Theotokos)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성 키릴루스는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를 설득하여 430년 8월에 로마에서 주교회의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같은 해 11월에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주교회의를 열어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단죄하여 교회 일치를 도모하였다.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 교황은 성 키릴루스로 하여금 네스토리우스를 축출하도록 지시하였고, 성 키릴루스는 431년 제3차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교황의 특사 자격으로 의장직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때 200명 이상의 주교들이 대거 참여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 이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가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 요한과 42명의 추종자들이 대거 몰려오기 전에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추종자 세력을 단죄하여 분쇄하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일파는 그들 나름대로 회의를 소집하여 성 키릴루스를
축출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성 키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를 체포하였으나, 교황대사가 와서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공의회의 결정이 올바르다고 전하자 성 키릴루스는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2년 후 안티오키아 주교들을 대표하는 요한 총대주교와 성 키릴루스는
위의 단죄를 인정하는 동의안을 결의하는데 도달하였고,
네스토리우스는 강제로 유배되었다.
그 후 성 키릴루스는 삼위일체와 강생에 관한 교리 확립과 신학 논문
저술에 여생을 바쳤고, 그리스도교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펠라기우스주의와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배격하는 일을 하여 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가장 유명한 신학자이다.
그의 저서는 정확한 사고와 명확한 전개 및 그 합당한 근거 제시로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성서에 관한 그의 주석서 가운데에는 요한, 루카 그리고 모세오경이 있으며,
수많은 교의신학 논문을 비롯하여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반박문,
편지 그리고 강론들이 전해온다. 그리스 교부의 한 명인 성 키릴루스는
1882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언되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은 6월 9일에 기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