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기경님의 진솔한 삶

김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신군부 세력과 5.18 광주(하) 』47

H-Simon 2009. 4. 11. 08:25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 신군부 세력과 5.18 광주(하) 』47




가장 고통스러웠던 70-80년대 광주의 5월
광주에서 계엄군과 시위대의 충돌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혈사태는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녀 보았지만 
소득이 없었다.  이 희성 계엄사령관을 만나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국민 대부분은 
정부 발표와 언론 보도대로 불순세력이 선동한 소요쯤으로 알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을 달래면서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님께 편지를 썼다. 혹시 도움이 될
지 몰라 그 안에 돈도 좀 넣었다. 광주는 이미 외부와 완전 차단된 상태였는데 이 계엄
사령관 협조를 구해 군종 신부 편으로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편지에 "광주의 진실을 
알려야 합니다. 따라서 진실이 필요합니다"라고 썼다. 
윤 대주교님한테서 짧은 답장이 왔다. "옳은 말씀입니다. 광주의 진실이 필요한 게 지금 
'진실'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 함 석헌옹, 재야논객 천 관우씨 등과 
함께 광주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했다.  군부를 자극하면 안 
된다는 의견이 우세해 광주 문제를 완곡하게 언급했는데 그나마도 동아일보 단신을 제
외하고는 어느 신문 방송도 성명 내용을 보도하지 못했다. 계엄사령부 장교들과 중앙정
보부 요원들이 신문사 편집국에 상주하면서 기사를 일일이 검열하던 시절이었다.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계엄 군과 공수부대의 무력 진압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혔
다. 6·25 사변 이후 최대 민족적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참으로 비통했다. 신군부 만행
에 울분을 느꼈다. 
난 본의 아니게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한가운데 있었다.그 20여 년 중에서 가장 
괴롭고 고통스럽던 순간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광주의 5월'이라고 말한다.  
광주에 내려가 시민들과 함께 피를 흘리며 싸웠더라면 그토록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으로 말하자면 현장에 계셨던 윤대주교님의 그것이 훨씬 더 컸을 것이다.
더구나 윤대주교님처럼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이 투철하신 분이 그 고통과 울분을 삼키
셨을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자신의 양떼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참극을 속수무책으로 
보고 있어야 하는 목자의 고통을 어느 누가 헤아리겠는가. 
5월 26일로 기억한다.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도청에 모여 있는 시민군을 무력진압하
고 작전을 종료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김 성용 신부와 평신도 2명이 용하게 광주에서 
빠져 나와 내게 광주항쟁 상황일지를 전해 주었다.   가슴을 쥐어 뜯으면서 울부짖어도 
시원찬 을 사실이 많이 열거돼 있었다. 
김 신부에게 부탁했다.   
"나중에 사실 그대로 증언하십시오. 흥분하거나 과장하면 절대 안 됩니다.이 불행한 사
태를 국민에게 올바로 알리려면 진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그런부탁을 한 이유는 내용이 상당히 부풀려진 유인물이 이미 나돌기 시작했기 때문이
다. 감정에 호소 하느라 사실을 과장한 내용이 훗날 거짓으로 드러나면 광주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민들이 '서울의 봄'을 환호할 때 어느 누구보다 변화의 물결을 반긴 사람이 나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도 기대려니와 이제 강론 대에서,  시국기도회에서 정치 얘기를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 이었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깨지고 말았다. 
당시 가톨릭대학생회 등 젊은층에서는 내가 사태 전면에 나서서 강력하게 대처해 주길 
촉구했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아니, 광주로 내려가 몸으로라도 계엄군을 막고 싶었다. 
혼자서라도 강경한 항의성명을 내려고 쓰고 찢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신문방송에서 
보도해 주지 않으면 유인물을 찍어서라도 항의하려고 했다. 
그러나 진실이 가려져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성난 젊은이
들을 불행으로 내몰 가능성이 컸다. 그건 마른 풀섶에 불을 던지는 꼴이다. 만일 젊은층 
요구대로 내가 자극적 표현을 써가면서 신군부를 연일 비판했더라면 유혈사태는 서울까
지 번졌을지도 모른다. 
누가 나에게 "그 때 최선을 다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럼 
아무 것도 안 했느냐"고 되물으면 "아니다.  나름대로 사태를 막으려고 노력했다"고 말
하고 싶다. 
광주는 빠른 속도로 질서를 회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신정권 시절처럼 물리적 
힘으로 유지되는 질서였다. 안충석 신부, 장덕필 신부 등 신부 10여명이 광주의 진실을 
알리다 붙잡혀 들어갔다. 정부 당국은 그들을 허위사실 유포죄로 몰아가기에 바빴다. 
'광주 시민의 아픔에 동참하며'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시국 담화(7월 22일)에서 "우리에
게 주어진 유일한 힘은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며, 기도는 세상 어떤 무력보다 강하다"면
서 신자들에게 기도를 당부했다. 
어두운 터널같은 그 순간에도 기쁜 일이 있었다. 광주 항쟁 가담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
은 3명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였는데 다행히 3명 모두 감형되거나 석방되었다.사형수 부
인들은 처음에 내 집무실을 무작정 점거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남편 생사를  내가 
손에 쥔 것도 아닌데 부인들이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암담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여러 경로로 접촉했다. 윤 대주교님과 군종교구 
정명조 신부(현 부산교구장)가 애를 상당히 많이 쓰셨다.사흘 만에 남편의 감형과 석방 
소식을 들은 부인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기쁜 소식이 들려 온 날 저녁, 
명동본당에서 마련해준 광주행 버스에 오르던 부인들의 환한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광주에 내려가면 그때 용감하게(?) 집무실로 쳐들어왔던 부인들이 가끔 찾아오곤 
했다. 
광주의 아픔이 잊혀지려면 적어도 1세기는 걸릴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광주의 5월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너무나 깊은 상처를 남겼다. 희생자들의 민주화 공로가 뒤늦게나마 
인정된 것은 다행이다. 
 <계 속>
[평화신문, 제736호(2003년 8월 10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가장 소중한 약속
가장 소중한 약속이 있습니다 
친구와의 약속을 어기면 우정이 금이 갑니다. 
자식과의 약속을 어기면 존경이 사라집니다.
기업과의 약속을 어기면 거래가 끊어집니다. 
지구와의 약속을 어기면 환경이 파괴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메모를 해 가며 약속을 지킵니다. 
하지만, 꼭 지키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약속도 있습니다. 
올해부터 기필코 담배를 끊어야지. 
이번 달부터는 정말 열심히 영어 학원엘 다녀야지. 
일주일에 한 권은 꼭 책을 읽어야지. 
오늘은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가야지 
그렇습니다. 
바로 나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기에 
그리고 그 때 그 때 쉽게 스스로를 용서해 주기에 
우리는 나 자신과의 약속엔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못 믿는다면 
세상엔 나를 믿어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 자신과의 약속을 맨 먼저 지키십시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약속인지도 모릅니다 
- 좋은 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