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기경님의 진솔한 삶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30『 추기경으로 임명 』

H-Simon 2009. 3. 27. 19:53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30
        『 추기경으로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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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인정받은 것 가장 기뻐
    


    1969년 2월 회의차 로마에 갔다가 미국을 거쳐 3월27일쯤 일본에 도착 했다. 그 때는 미국에서 한국에 들어오려면 일본을 경유해야 했다.
    도쿄에 내린 김에 상지(上智)대학에 계시는 은사 게페르트 신부님을 찾 아뵙고 문안을 올렸다. 그리고 후지산 자락에 있는 작은 자매회 수녀원 에 가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다음날 서울행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나가 려고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동행한 장익 비서신부(현 춘천교구장)와 가방을 들고 막 나서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잠시 후 한 수녀가 "대주교님, 전화 왔어요" 하며 나를 불 렀다.
    "이상하다. 나한테 걸려 올 전화가 없는데…"라고 중얼거리면서 수화기 를 받아 들었다. 전날 찾아 뵌 게페르트 신부님이었다. "아, 김 대주교, 축하해요" "축하라뇨, 오늘 제 생일도 아닌데 무슨 축하입니까?" "김 대주교가 추기경이 됐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추기경! 교황님이 당신을 추기경에 임명하셨어요." "무슨 농담이세요" "아니라니까. 여기 신문에 당신 이름이 이렇게 났어요." "…… "
    수화기를 들고 한동안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 내가 한 첫 말은 "임파서블(impossible, 불가능 한)"이었다.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장 신부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허허, 허허, 장 신부, 내가 추기경이 됐데"라고 겨우 한마디 했다. 수녀원 앞에서 택시를 못 타고 100m 정도 걸어서 성심 수녀원까지 내려갔다. 그 곳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한국 수련자들에게 얼굴이라도 비치고 갈 참이었다.
    그런데 그 곳에 있는 일본 수녀와 한국 수련자들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꽃다발까지 안겨 주면서 축하해주었다. 수녀들이 그 짧은시간 에 꽃다발을 준비한 것 역시'불가능한' 일이었다.무엇에 홀린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은사신부님이 내 숙소를 수소문하는 동안 얘기가 퍼진 것 같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교황님은 물론 인류복음화성장관 아가자냔 추기경 님도 그에 대한 암시를 전혀 주시지 않았다. 그러니 어리둥절한 것은 당연했다.
    아무튼 김포공항에 도착했더니 노기남 대주교님과 주한 교황대사 로톨 리 대주교님 등 300여명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의 영광 김수환 추기경 탄생'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는 신자들을 보고 나서야 조금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는 그 전날 외신보도를 통해 나보다 먼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때 은사 신부님이 출발 직전에 전화를 해 주셨기에 다행이었지 그걸 모르고 공항에 내렸더라면 웃지 못할 해 프닝이 벌어졌을 것이다.
    추기경은 알다시피 교황 다음가는 고위 성직자다. 그런데 난 추기경 임 명통보를 받는 순간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다. 그 인정은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순 교자들의 도우심과 신자들의 희생봉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었기에 감사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망갈 길이 정말 막혔구나'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 았다. 소신학교 입학, 일본유학, 사제수품, 주교임명 등 신상에 어떤 변 화가 일어날 때마다 결국에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서는 '도망갈 방법은 없을까'라는 궁리를 떨치지 못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에서 추기경이 가장 먼저 탄생했고 이어 인도,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순으로 추기경이 나왔다. 그러니까 아시아에서 그 다음 추기경이 한국교회에서 나온 것이다.(물론 대만의 폴 유핀 대주교, 필리핀 세부의 줄리오 로살레스 대주교도 나와 같은 시기에 임명됐다) 서울대교구 신부와 신자들뿐 아니라 지방교구에서도 이 사실에 함께 기 뻐했다.
    주교가 추기경이 됐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임명된 후에 '추기경이 뭐 하는 사람인가'하고 법전을 뒤져 보았더니 복장이 순교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 색으로 바뀌고, 주교도 들어갈 수 없는 일부 봉쇄수 도원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정도였다. 추기경이라고 해서 어떤 특 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교황선출권은 의미있는 권한이다.
    옛날에는 추기경을 '교회의 왕자(Prince of Church)' 또는 '교황의 왕자 '라고 부르고 '전하(殿下)라는 존칭을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추기경은 로마에 가면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벤츠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게 관례였다.
    나도 추기경이 된 직후 로마에서 바티칸 소유의 벤츠를 이용해보았다. 바티칸에서 내주는 벤츠 뒷좌석에 앉아 한껏 폼(?)을 잡기는 잡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공짜가 아니라 이용자가 요금을 내는 것이었다. 일반 택시요금보다 배가 비쌌다. 그래서 그 후부터 택시를 이용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 회 정신을 하나씩 하나씩 실천하는 시기라서 바티칸 도 얼마 안가 벤츠를 처분했다.
    추기경 서임행사는 4월28일부터 며칠간 로마에서 거행됐다. 나와 함께 추기경에 임명된 33명은 지정장소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교황특사가 들 고 온 임명장을 받았다. 난 우르바노대학에서 유핀 추기경, 로살레스 추 기경, 그리고 독일 유학시절 은사인 훼프너 추기경과 함께 임명장을 받 았다. 그런데 내가 존경하는 훼프너 추기경님이 임명 순서상 내 뒤였다. 그래서 "교수님, 제자가 먼저 받아서 죄송합니다"라고 석고대죄(?)하면 서 임명장을 받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교황님이 수여하는 팔리움, 관(冠), 반지를 받고 6월1일 교황님 과 다 함께 성베드로대성전에 모여 감사미사를 성대하게 봉헌했다. 새 추기경들이 대성전에 줄지어 입장할 때 길 양 옆에서 박수를 치던 사람 들 중에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이들이 많았다. 다들 연세가 지긋한 새 추기경들 속에 47세 앳된 동양인이 끼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당시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요즘 한국교회에 새 추기경이 탄생하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 소망을 이미 여러 차례 교황청에 전달한 상태이다. <계 속>
    [평화신문, 제736호(2003년 8월 10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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