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기경님의 진솔한 삶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8 『 학도병으로 전쟁터에서 』
H-Simon
2009. 3. 27. 19:28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8 『 학도병으로 전쟁터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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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학병시절 전석재 신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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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명축일에 태평양의 작은 섬으로
1944년 결국 학병으로 입대해 일본 중부 나가노 부근 마쯔모도라는 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고된 훈련이 연일 계속됐다. 얼마나 잠이 부족하고 배가 고팠던지 그 때 소원은 딱 두 가지였다. 배가 부르도록 실컷 먹고, 허리가 뻐근할 때까지 드러누워 실컷 자는 것. 요즘은 밤마다 잠이 안 와서 고생을 하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잠이 쏟아지던지….
훈련소에서도 입 바른 소리 잘하는 성격이 불거졌다. 어느 날 나이 많은 고참상사가 나와 친구를 부르더니 허심탄회 한 대화를 제의했다. 그는 우리가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그 자리에서 고지식하게도 한국인에 대한 차별의 부당성 같은 얘기를 해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 때까지만 해도 훈련병들 가운데 훈련점수가 2위였는데 그 날 이후로 꼴찌에서 2번째로 급락했다. 그 바람에 사관후보생 자격시험을 치를 기회도 박탈당했다.
훈련을 마치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 커튼을 모두 내렸기 때문에 남으로 가는 건지, 아니면 북으로 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전선(戰線)으로 간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기차가 멈췄다. 유학생활을 하던 동경과 그리 멀지 않은 요코하마였다. 그 곳에서 일주일 가량 대기하는 동안 온갖 흉흉한 얘기가 다 들려 왔다. 요코하마 대기 병력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는데 십중팔구는 도중에 미군 잠수함 공격을 받아 물고기 밥이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요코하마 대기소는 사찰이었는데 그 곳에서 성탄절을 맞이했다. 전선으로 떠날 날을 기다리면서 성탄 밤을 지내는 신학생의 신세가 갑자기 서글퍼졌다.
그 때 목사수업을 받다 입대한 친구가 "거룩한 성탄 밤인데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조용한 곳으로 가서 함께 기도하자"고 제의했다. 기쁜 마음으로 따라 나서 조용한 곳을 찾아보았더니 불상 뒤가 제격이었다.
그 자리에 사람들이 버린 잡동사니가 좀 있었는데 일본 가요집이 눈에 띄었다. 가요집에 성탄캐럴 송 '고요한 밤'도 있었다. 우린 이래저래 잘됐다 싶어 기도하고 나서 가요집을 펴 들고 '고요한 밤' 노래를 정말 거룩하게 불렀다.
요즘 일치주간이 돌아오면 천주교, 개신교 등의 그리스도교인들이 한데 모여 일치기도회를 여는데 우린 벌써 그 때 일치기도회(?)를 연 셈이다. 그것도 옆에 부처님까지 모셔 놓고 말이다.
이튿날 2000톤급 화물선에 올라 태평양으로 나갔다. 그 날이 마침 내 영명축일(스테파노)이라 괜 시리 마음이 울적했다. 파견 지는 남쪽의 작은 섬 부도라는 곳이었다. 직선 거리로 3일이면 갈 것을 미군 잠수함을 피해 지그재그로 가야 하기 때문에 꼬박 6일이 걸린다고 했다. 배 멀미가 하도 심해서 아무 것도 먹고 마시지 못했다. 배에는 연료 드럼통과 탄약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 위에 가마니를 깔고 축 늘어져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항해가 거의 끝 나갈 무렵이었다. 친구가 헐레벌떡 뛰어 내려오더니 비상 구명대를 챙겨 빨리 갑판으로 올라가라고 소리쳤다. 미군 잠수함이 출몰(出沒)하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갑판 위에서 사색이 되어 검푸른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연료와 폭발물을 산더미처럼 실은 배가 어뢰 공격을 받으면 배는 물론이고 사람도 산산조각이 날 판이었다.
겁에 질려서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 폭풍 전야의 고요가 느껴졌다. 물결이 찰랑찰랑 흔들리는 수면 저 아래에서는 이미 어뢰가 배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태평양 망망대해에서 맞닥뜨린 절제절명의 위기.
그 순간 어머니의 모습이 수평선 위로 또렷하게 떠올랐다. 불현듯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어머니의 무릎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참 이상한 체험이었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만일 내가 죽게 되더라도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는 절대 죽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어미의 심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마지막 순간에 눈에 밟힌다면 자식의 고통 또한 얼마나 클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죽음이 닥치자 정반대로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졌다.
나는 그 때 스스로 만들어 낸 생각과 본심(本心)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그 이후로 내 생각이 앞설 때면 나의 본심, 즉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참 모습이 무엇인가를 성찰해보게 되었다.
천만다행으로 잠수함은 우리 배를 공격하지 않았다. 죽음을 모면한 것이 기쁘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큰 하느님 사랑에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또 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어머니에 대한 정이 이토록 애틋하게 마음 속에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때는 어머니의 사랑이 부담스러워 일부러 거리를 둔 적도 있었는데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내 인생의 큰 소득이다.
우리가 주둔한 섬에서는 다행히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유황 도를 미군이 점령하고 난 후에는 매일 오전 일정한 시각에 미군의 폭격이 있었다. B-29 폭격기가 일본 본토를 폭격하고 돌아오다 남은 포탄을 소진하느라 떨어뜨리는 폭격이었기 때문에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침내 나와 동료 학병 몇 명은 유황도로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은밀히 계획을 세웠다.
카누처럼 생긴 조그만 배 한 척을 어렵사리 구했다. 그리고 수류탄, 비상식량 건빵, 흰 천을 감춰 두었다. 흰 천은 바다 한가운데서 미군 비행기나 군함을 만나면 항복의 표시로 흔들려고 준비했다. 탈출 직전까지 우리를 망설이게 한 것은 유황 도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D-day,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았다.
탈출의 날이 밝았다. 아침에 미군 B-29 폭격기가 포탄을 쏟아 붓고 돌아가면 곧바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작정이었다. 우리 일행은 몸을 숨기고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각에 나타나는 폭격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날 따라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 폭격기가 보이질 않았다. 폭격기가 돌아간 후에 출발해야지 만일 바다 한가운데서 폭격기를 만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기다리면 기다릴 수록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냥 부대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태평양 한가운데서 죽을 각오를 하고 출발하느냐의 선택만 남았다. 우린 출발하기로 결정하고 배를 띄웠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미군 폭격기가 그제 서야 나타났다. 파도가 심해 한 사람은 멀미를 하느라 정신을 못 차렸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배를 돌려 부랴부랴 섬으로 되돌아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도주계획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우리의 목적지 유황도는 200마일(약 320㎞)이나 떨어져 있었다. 카누처럼 생긴 배를 타고 도주하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다.
그리고 그 날 부대에 조금만 더 늦게 복귀했더라면 총살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일본(군)을 비난하는 편지를 내 사물함에 꽂아 두고 출발했으니 말이다. 한창 혈기왕성 한 나이라서 겁없이 도주를 감행했지 나이가 조금 더 들었더라면 그런 무모한 계획을 행동에 옮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럭저럭 부대생활을 했다. 남의 나라 전쟁터에 끌려 나온 학병 신분이었기에 별다른 의미를 둘 수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연합군에 무릎을 꿇었다. 일본의 항복은 우리 민족의 해방이었다.
'아, 고국에선 36년 압제의 사슬에서 풀려 난 백성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외치고 있겠지….' 일본 군복을 입고 있는 조선 학병의 기쁨과 감격은 더 컸다.
미군은 몇 달 동안 우리를 완전히 무장 해제시킨 후 섬에 상륙했다. 일본군측에서는 부대원들이 미군과 접촉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시켰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미군은 일본 군인들을 본토로 송환하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억울하게 끌려 온 한국인들을 먼저 풀어 줘야 하는데 미군은 무슨 영문인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여기에 강제로 끌려온 한국인들이 있으니 빨리 돌려보내 달라"는 내용의 영문편지를 쓰고 맨 밑에 '스티븐 김'이라고 싸인을 했다. 내 세례명을 영어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편지는 내가 갖고 있던 콘사이스 영어사전과 동료의 중학교 1학년용 영어교과서, 그리고 우연히 손에 쥔 'LIFE'라는 영문 화보잡지를 총동원해서 쓴 것이다. 문제는 미군과의 접촉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어떻게 편지를 전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미군 주둔지역 정지(整地)작업에 불려 나가 일하던 중 트랙터를 몰고 있는 미군 병사에게 살짝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난생 처음 영어로 말을 하는 데다 절박하게 부탁하는 입장이라 내 딴에는 깍듯이 예의를 갖췄다.
"Would you pease be kind enough to speak with me?" "What?" "… …" "What?"
미군 병사가 그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접촉을 포기하고 땅에 주저앉아 묘안을 짜냈지만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후 그 병사가 다가오더니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느냐"는 식으로 말을 걸어왔다. 너무나 반가웠다.
난 땅바닥에 한반도와 일본 지도를 그려 가면서 "여기는 일본, 저기는 한국. 난 한국 사람이다. '히로이드'(미국식 일본 천황 이름)를 증오(hate)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너희 사령관에게 전해 달라"면서 병사 손에 몰래 쥐어 주었다. 며칠 후 미군측에서 요란스럽게 편지의 주인공을 찾아다녔다. 한국인이 열 댓명 있었으니까 나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미군 사령관은 나를 불러놓고는 "내가 사령관이다. 질서문란 행위는 용납하지 않는다"면서 엄포만 놓았다. 실망하고 나오는데 사령관 부관인 중위가 나를 따로 불렀다. 의사소통이 안돼 몸짓과 필담(筆談)으로 1시간 가까이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왜 나를 따로 불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중위는 "그 동안 이 섬에 미군 조종사 열댓 명이 공격을 받고 추락했다. 그들의 행방을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미군이 한국인을 풀어 주지 않는 이유를 그제 서야 알았다. 일본군들이 모두 모른다고 발뺌을 하자 한국인들에게 정보를 캐낼 요량으로 붙잡아 둔 것이었다.
그 얘기라면 나도 아는 것이 있었다. 체포된 미군 조종사들이 묶여 있는 것은 두 눈으로 직접 본 데다 그 이후 일본 군인들이 미군 인육(人肉)을 먹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건너편에 일본군이 있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알아도 말할 수 없다"며 한국인에 대한 신변 안전보장을 요구했다. 그가 내 요구를 받아들여 그 섬의 한국인들은 모두 미군지역(American Zone)으로 들어왔다. 육군에는 학병들이 전부였으나 해군 쪽에서는 100명이 넘는 한국인 노무자들이 넘어왔다.
그 때 일본 해군 사령관이 노무자들에게 무슨 거짓말을 했던지 그들은 "학병 몇 명 때문에 이제 미군 종살이를 하게 됐다"며 우리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난 "미군의 손을 거쳐야 우리가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그들을 설득했다.
다행히 노무자들 중에서 목격자 3명이 나타났다. 그 무렵 괌(Guam)에서는 전범(戰犯)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미군측의 동행 요청을 받고 재판증인으로 나설 노무자 3명과 함께 괌으로 건너갔다.
[평화신문, 제731호(2003년 7월 6일),김원철 기자][편집 : 원 요아킴]
♣갈멜수도회 수도자들의 삶을 노래한/故 최민순 신부님의 아름다운 詩♣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