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3월 11일 聖에울로지오,聖女아우레아님..등

H-Simon 2011. 3. 10. 15:12

 

 

3월 11일(금)

聖에울로지오,聖女아우레아님..등

 

 

  

 
 
코르도바의 성 에울로지오(Eulogius)의 순교
 
                 

                              

 

  

 

    ▶에울로지오(3.11)
 
성인명 에울로지오(Eulogius)
축일 3월 1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코르도바(Curdoba)
활동연도 +859년
같은이름 에울로기오, 에울로기우스, 에울로지우스

 

코르도바의 성 에울로지오(Eulogius)


   에스파냐의 코르도바가 무어인들의 통치를 받을 때
그곳의 이름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난 성 에울로기우스(에울로지오)
스페란도 원장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학덕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특히 성서에 대한 지식이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그는 나바라(Navarra)와 팜플로나(Pamplona)의 많은 수도원을 위하여
규칙서를 저술하였다.

   850년 무어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때 그도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두 그리스도인 여성인 플로라(Flora)와 마리아(Maria)를 위하여
“순교에 대한 권고”를 썼다.
그 두 여성은 처음에 노예로 팔려가도록 결정되었으나
에울로기우스의 권고에 힘입어 며칠 후에 순교하였다.
 
그런데 에울로기우스 자신과 다른 몇몇 죄수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석방되었다.
그 후에도 박해가 계속되었는데
그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는데 지칠 줄 몰랐다.
그는 톨레도(Toledo)의 대주교로 선출되었으나 착좌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런 와중에서도 이슬람교에서 개종한
레오크리티아(Leocritia)란 여성을 도왔는데,
그 당시의 법으로는 이런 개종자는 즉시 사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그녀를 피신시켜야만 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그녀가 발각되었고 또 그녀를 도와 준 이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이때 에울로기우스도 사형을 받았다.
 
그는 그 당시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기록한 “순교록”을 저술하였고,
 “호교론”을 남겨 그리스도교 신앙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크게 역설하였다.

 

    ▶아우레아(3.11)
 
성인명 아우레아(Aurea)
축일 3월 11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녀
활동지역 산 밀란(San Millan)
활동연도 +1100년경
같은이름  

 


   에스파냐가 무어인들의 지배를 받을 때
수도 생활을 염원하는 신자들은 한적한 산에 그들의 수도원을 손수 짓고
고독한 싸움을 하는 것이 일종의 관습이 되었다.
 
칼라호라 교구의 상 에브로 지방에는 라 코골라 원장의 지도하에
이런 생활을 하는 여성들의 거주지가 있었는데,
그 아래에 가르시아 눈누스와 그의 아내 성녀 아무니아(Amunia)가
 딸 아우레아와 함께 생활하였다.
그들은 성서를 늘 공부하고 성녀 아가타(Agatha), 에우랄리아(Eulalia)
그리고 체칠리아(Caecilia)의 전기를 묵상하다가
수도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성녀 아우레아는 그들이 늘 공경해 오던 위의 세 성녀의 환시를
보았는데, 그녀에게 영광의 월계관을 분명히 약속하였다고 한다.
그 때부터 아우레아의 보속 생활과 기적들은 도처에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치명적인 병을 앓다가 어머니의 품안에서 운명하였는데,
많은 수도자들이 운집하여 그녀의 임종을 지켜보며
그녀의 성덕을 찬양하였다고 전한다.

 

 

   ▶요한 세례자 리기(3.11)
 
성인명 요한 세례자 리기(John Baptist Righi)
축일 3월 11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신부
활동지역 파브리아노(Fabriano)
활동연도 1469-1539년
같은이름 리기, 밥띠스따, 밥티스타, 밥티스트,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파브리아노의 복자 요한 세례자 리기(Joannes Baptista Righi)


   이탈리아 안코나(Ancona)의 파브리아노에서 태어난
요한 세례자 리기(Joannes Baptista Righi)는 아주 겸손한 프란치스코회 사제였지만
 그의 엄격한 생활은 사막의 교부들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는 흔히 한 주간 동안을 꼬박 음식 없이 지냈고,
주님 공현 대축일부터 부활 대축일까지 단식재를 지켰다.
그러나 주일과 목요일만은 제외하였다. 밤 기도가 끝난 후에도
그는 밤새도록 성당에 남아 혼자 기도하였다.
 
그는 키가 작고 또 얼굴이 여위었어도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공경은 1903년에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