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9일(화)
카나다의 聖 요한 드 브레뵈프님..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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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성 요한 드 브레뵈프(Joannes de Brebeuf)  |
프랑스 노르망디의 콩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성 요한은
어려서부터 사제가 되길 원하였다.
그러나 사제직을 감당해 낼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몸이 약하였다.
하지만 그는 1617년에 루앙의 예수회에 입회하여 1615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선교사를 지원하여 캐나다 퀘벡 주로 떠났으며,
주로 인디언 휴런족이 많이 거주하는 동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캐나다로 온 이후 그는 인디언들 사이에서 34년 동안이나
전교활동을 개척한 유명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고초는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629년 영국인들이 퀘벡을 점령하고 예수회원들을 몰아낼 때 그도 쫓겨나서
하는 수 없이 프랑스로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1633년 다시 캐나다로 돌아와 같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본격적으로전개하였다.
1637년 천연두가 만연하여 수천 명의 인디언들이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선교사들이 재앙을 몰고 온 악마로 간주되어 인디언
마술사들로부터 큰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요한은 그 와중에도 인디언들 곁을 떠나지 않고
1640년까지 함께 거주하였다.
그가 잠시 퀘벡으로 갔다가 다시 인디언 부락으로 왔을 때,
프랑스와 가장 적대적이던 이로쿼이인디언들로부터 체포당하여 처참하게
살해당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가 보인 용기와 성덕은 수많은 인디언들을 감동시켜,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약 7천 명의 인디언 개종자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는 휴런족을 위해 프랑스어-휴런어 사전과 그들의 언어로 된 교리서를
저술하였다. 성 요한과 더불어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은
1930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 공경을 받고 있다. |

캐나다의 수호성인들 |
성 카롤루스 가르니에(Carolus Garnier, 가롤로)는 예수회 사제로 서품된 후에
인디안 사목을 위하여 캐나다의 퀘벡으로 갔다.
1649년 그가 정착해 있던 휴런족인디언 마을이 적대적인
이로쿼이족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자,
그는 그들을 도망가도록 하다가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기어가다가 전투용 도끼를 맞고 절명하였다.
가르니에 신부의 장상은 그를 이렇게 말하였다.
“웃으면서 선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가르니에 신부는 캐나다에서 순교한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
성 가브리엘 랄르망은 1630년에 예수회원이 되어 외국 선교에
헌신하였으나 건강은 늘 좋지 못하였다.
2년 동안 캐나다 퀘벡에서 사목한 후
그는 성 요한 드 브레뵈프와 합류하여 인디언 휴런족선교에 나섰다.
그곳에서 6개월 정도 활동할 즈음에 이로쿼이족의 습격을 받아 2명의
사제가 포로가 되어 생 이나스까지 호송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몸서리치는 고문을 받았는데 브레뵈프 신부는 몇 시간
내에 운명하였으나, 아주 묘하게도 가브리엘 랄르망 신부는 그날 밤은
넘겼지만 결국은 살해되고 말았다.
랄르망 신부는 캐나다에서 순교한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

십자가의 성 바오로(Paulus) |
이탈리아의 오바다 태생인 성 바오로 프란치스코 다네이는 몰락한
어느 귀족의 맏이로 태어났고, 부모의 신앙 유산을 물려받은 탓인지
15세 때에 이미 카스텔라초의 자기 집에서 엄격한 고행과
보속을 행하였다.
1714년 그는 터키인들과 싸우는 베네치아 공국의 군대에 입대하였으나,
기도와 보속생활에 이끌려 명예 제대를 하고 귀향하였다.
그는 결혼도 마다하면서 몇 해를 은거하던 중 1720년에
예수의 성명과 흰 십자가가 그려진 고난의 문장을 검은 옷에 단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그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교하는
수도회 설립을 명하셨다고 한다.
그의 환시가 올바른 사실임을 인정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부터
수도회 설립에 관한 허가를 받게 된 바오로는 40일간의 피정을 통하여
회칙 초안을 마련하였다.
그는 자기 동생인 요한 밥티스타와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청의 허가를
신청하였다.
처음에는 거절당하였으나 1725년의 방문에서는 교황 베네딕투스 13세로부터
수련자를 받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1727년에는 자신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들은 몬테 아르젠타리오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규칙이
너무 엄격했던 탓으로 많은 수련자를 잃었다고 한다.
1737년에는 첫 수도원의 문을 열었고, 1741년에는 교황 베네딕투스 14세로부터 개정 회칙을 승인받았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십자가와 고난의 맨발 성직 수도회'
(예수 고난회)가 전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바오로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초대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 전역을 누비며 선교 여행을 하였고,
그의 설교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여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또한 그는 초자연적인 은혜로써 축복을 내렸고,
치유의 기적과 원거리에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기적 등이 나타났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설교가였다.
그는 예수 고난회의 최종 승인을 1769년 교황 클레멘스 14세로부터 받았다.
또한 그의 노력에 의하여 여자 수도회 수녀들이 코르네토에
첫 수도원을 갖게 되었다.
그는 3년 동안의 병고로 고생하다가 1775년 10월 18일 로마에서 운명하였고,
1867년 비오 9세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
루이스 트리스탄의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Petrus) |
에스파냐 중서부 에스트레마두라의 알칸타라 지방장관의 아들로 태어난 성 베드로 가라비토는 살라망카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고,
16세 때에 만하레테스에 있는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엄격한 보속 생활을 실시하던 중에 바다호스로 파견되었고,
1524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에서 설교하면서, 로브레딜로, 플라센시아, 라파
그리고 에스트레마두라 수도원의 원장으로 봉사하였으며,
라파 수도원을 봉쇄수도원으로 요청하여 허가를 받기도 하였다.
또 한때 그는 궁중의 전속사제로 일하다가 1538년에는 관구장이 되었다.
그는 다소 엄격한 규칙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관구 총회에서 통과시키지 못하자 관구장직을 사임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리스본 교외 아라비다 산에서 성 마리아의 마르티누스 수도원의 형제들과 함께 은수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수많은 수도자들이 그들의 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따르려고 하였다.
관구 내에서 자신의 규칙이 통과되지 못하자 그는 코리아 교구의 주교로부터
승인을 얻은 후 새 수도원을 세울 허가를 교황 율리우스 3세로부터 받았다.
이것이 바로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의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다른 수도원들도 그의 규칙을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1561년에는 성 요셉 관구가 설립되었는데,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의 관할 아래 두게 되었다.
1560년 그는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Teresa of Avila, 10월 15일)를 만나서
그의 고해신부 겸 상담자가 되었으며, 카르멜 개혁운동을 격려하였다.
그는 “기도와 묵상론”을 썼는데,
이것이 후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 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562년 에스트레마두라에서 사망하였고,
1622년 4월 18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에 의해 시복된 후
1669년 4월 28일 교황 클레멘스 9세에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그는 1862년부터 브라질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는
위대한 신비가였다. |
막시미누스 황제 치하의 박해 때 순교한 성 바루스(Varus, 10월 19일)의
유해는 클레오파트라라는 어느 신자 과부에 의하여 털로 만든
가마니에 숨겨서 아드라하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성녀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았으므로
그들은 순교자의 무덤을 중심으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성녀의 아들 요한(Joannes)이 군인이 되었을 때 그녀는 성 바루스를 공경하는
대성당을 짓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성당을 완공한 날에 그 아들이 갑자기
병을 얻어 죽어버렸다.
그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몸부림치다가 하느님께 당신의 외아들을
살려주십사고 늘 기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꿈에 성 바루스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이 내게 보여 준 사랑을 내가 잊은 듯싶은가?
내가 그대의 아들을 살려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은 듯 보이는가?
보라. 이제 그 응답이 왔다.
그는 이제 기력을 되찾았다.”
성녀는 “이제 만족합니다.
그러나 나도 이제 성인과 내 아들과 함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자,
“안 된다. 나는 네 아들과 함께 있어야 하니 좀 더 기다리면
우리가 영접할 것이다." 하고 성인이 대답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성녀는 지금까지의 모든 슬픔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녀는 오로지 순교자에 대한 사랑으로 여생을 살다가 운명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성 바루스와 아들 요한 곁의 대성당에 안장하여
공경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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